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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그는 대한민국의 과학자입니다

그는 대한민국의 과학자입니다
  • 저자노광준
  • 출판사스틱
  • 출판년2018-11-28
  • 공급사(주)북큐브네트웍스 (2019-01-04)
  • 지원단말기PC/스마트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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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이오 경제시대 문턱에서 황우석을 다시 보다.”



    11년 전, 세계를 숨죽이게 한 황우석 사건의 실체와 그 후 황 박사의 행보에 대해 10년간의 취재를 통해 치밀하게 재구성한 책. 라디오 피디인 저자는 지금도 논란이 분분한 황 박사 관련 의혹을 끈질기게 추적해 기록했다. 다양한 속설 중 사실을 발굴하고 퍼즐 맞추듯 사건을 재구성해낸 것. 시민 165명의 크라우드 펀딩에 의해 지어졌다.

    지난 2014년 1월 세계적인 과학저널인 〈네이처〉와 〈사이언스〉가 황우석 박사의 최근 근황을 잇달아 특집기사로 전했을 때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한 달 뒤 특허가 등록됐다. 서울대 조사위원회가 실체를 부정했던 황우석 1번 줄기세포가 미국에서 특허로 등록된 것이다. 비판자들은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고 일축했지만, 그로부터 1년 뒤 황 박사는 미국의 줄기세포 석학과 손잡고 중국에서 또 다른 연구를 시작했다. 중국의 바이오기업은 그에게 7천억 원대 투자를 약속했고, 그는 이미 러시아 북동연방대학과 손잡고 시베리아의 매머드복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으며, 최근 중동의 산유국가와 대규모 연구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논란 이후 적게 잡아 32편의 SCI급 국제학술논문을 발표해왔다. 우리는 황우석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으며 그에 대한 숱한 속설은 과연 객관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일까?





    “뉴욕타임스 기사를 보며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10명 중 7명꼴로 황 박사에게 다시 줄기세포 연구기회를 줘야 한다는 여론이 잡히고 있지만, 한국정부는 여전히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있다. 10년째 황우석 사건을 추적해온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2014년 황 박사에 관한 뉴욕타임스 기사를 보면서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실험실로 들어가는 그의 가슴팍엔 여전히 ‘황·우·석’이란 이름 석 자가 한글로 새겨져 있었으니까요. 옳고 그름이나 호불호를 떠나 그는 여전히 대한민국의 과학자입니다. 왜 기회조차 주지 않고 파묻어버리려 하죠? 이제 사실에 기반을 둬 미래를 일굴 시간입니다.”





    시골피디의 황우석 박사 10년 취재기



    - “이 영화 같은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0년째 줄기세포 연구기회를 얻지 못한 채 외국을 오가며 연구하는 줄기세포 과학자 ‘황우석 미스터리’에 대한 세상의 편견과 사실왜곡에 관한 이야기. 2014년 대법원에서 ‘사기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지만, 여전히 희대의 사기꾼 취급을 받으면서 단 1초도 한국에서 줄기세포 연기기회를 허락받지 못한 채 외국을 오가며 줄기세포를 연구할 수 있는 봄날을 기다리고 있는 대한민국 과학자 이야기!

    - 속칭 ‘황빠 5호’로 불리는 시골피디. 황우석 사건의 미스터리를 10년간 낱낱이 추적!

    평범한 두 아이의 아빠인 시골피디는 줄기세포의 ‘줄’ 자도 몰랐다가 우연히 2005년 12월 16일 황우석 박사와 노성일 이사장 간의 진실공방을 TV로 보면서 10년간의 장기취재라는 지옥문에 제 발로 들어섰다. 사기당한 자가 사기꾼이 되어 주저앉는 이상한 사건에 빨려 들어간 것이다. 그곳에서 본 것은 줄기세포의 진실이었고, 난치병 소년의 눈물이었다. 특허전쟁, 음모와 배신, 죽은 개를 복제하고 수만 년 전 얼어붙은 매머드를 깨우려는 첨단과학의 실체였다. 자신의 조국에서 버림받고 연구에 매진하는 대한민국 과학자의 집념이었다. 그것은 차라리 한 편의 영화였다. 그 후 십 년이 흘렀고, 그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고 사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취재를 시작한 날로부터 지난 2015년 12월 31일까지 황우석 사건을 재구성해 기록, 무려 3,665일(10년 15일)이다.

    - 10년 전쟁의 기록

    2014년 가을, 황우석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제보자〉의 사실왜곡에 맞서 책 출간을 위한 크라우드 펀딩에 돌입, 시민 165명의 참여로 책은 제작되었다. 10년간의 법정취재와 연구현장 인터뷰, 다양한 국내외 전문자료 분석을 통해, 국제적인 생명윤리 정치와 특허 경쟁의 맥락 속에 펼쳐진 줄기세포의 진실과 기술력의 실체, 죽은 개복제와 매머드복제 시도에 이르는 황우석 박사의 최근 근황까지 빼곡히 적어놓았다.(www.podbbang.com/ch/8249) 취재 3,665일, 바이오 경제시대 황우석 연구를 둘러싸고 처절하게 전개된 10년간의 전쟁이 시작된다. 책의 공간적 배경은 황우석 쇼크가 격렬하게 전개된 한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이후 황 박사의 연구여행 코스인 북아프리카의 리비아, 러시아 시베리아, 중국 본토에 이르는 5개국이다. 시골피디는 책을 통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조국에서 버림받고 열사의 땅 리비아와 얼어붙은 시베리아, 그리고 중국 본토를 오가며 사력을 다하고 있는 60대 과학자의 집념과 의지를 담고 싶었다.”라며, 이 이야기를 지금 이 순간 공정한 기회와 정의로운 터닝포인트를 찾고 있는 모든 분께 들려드리고 싶다고 말한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이 드라마 같은 이야기의 끝은 어디일까? 한국에서 연구기회를 얻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이 나라를 떠나 중국이든 중동의 어느 나라든 전 세계 난치병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희망이 되는 과학자로 활발히 날개를 폈으면 하는 마음을 간절히 담았다.





    1.6%의 기적과 과학자의 절규



    - “대한민국의 기술만은 지키고 싶다.”

    성공확률 1.6%. 지난 2005년 세계 최초로 복제개 ‘스너피’를 성공시켰을 때의 성적이다. 언론은 ‘효율이 워낙 낮아 실용화는 어려울 것’이라 평했다. 그러나 7년 뒤 무려 27%의 성공률로 코요테를 복제했고 2014년 평균 35%의 개복제 성공률로 실용화 궤도에 진입했다. 사기꾼 취급받던 황우석팀은 10년도 채 되지 않아 1.6% 희미한 가능성을 35%라는 현실로 만든 것이다. 이것이 과학이 주는 기적이 아닐까?

    바이오 경제시대다. 전 세계가 미래 먹거리 주도권을 쥐기 위해 총성 없는 전투를 벌이고 있는 지금 다시 생각해본다. 만일 그때 그 추웠던 10년 전 겨울, 논문조작에 관한 책임은 내가 다 질 테니 6개월만 시간을 달라던, 다시 줄기세포를 만들어서 기술만은 지키고 싶다던 과학자의 그 간절한 절규를 외면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은 어떠할까?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왜 이제껏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헐뜯고 파묻어버리려고만 했을까? 그 묻혀버린 실체 속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왜 그랬을까?



    숱한 궁금증과 의혹 덩어리를 단 한 권의 책으로 가슴 시원하게 뚫어줄 것이다. 시골피디는 지금 이 순간에도 모진 병마와 싸우며 눈물의 검색을 하고 계실 분들을 생각하며 또 고뇌한다. 누군가에 의해 덧씌워진 이른바 ‘황우석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다시 줄기세포의 봄이 찾아오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들은 도대체 왜, 왜 황우석만 주저앉히면 된다고 한 것일까?’ ‘왜?’



    - 왜 〈PD수첩〉은 황우석 한 사람만 주저앉히면 된다고 공언했고 불방된 KBS 〈추적60분〉에 담겼던 내용은?

    - 서울대가 실체를 부정한 황우석 1번 줄기세포는 어떻게 미국과 캐나다에서 물질특허로까지 등록될 수 있었을까?

    - 어떻게 20명이나 되는 젊은 연구원들이 서울대를 나와 빈털터리 황 박사를 따라나설 수 있었는가?

    - 서울대는 왜 국제관행인 재연실험기회도 주지 않고 서둘러 결론을 발표했을까?

    - 황 박사 연구를 의도적으로 방해해온 ‘업무방해 유죄 확정판결’의 당사자는?

    - 시베리아의 매머드 복원 프로젝트는 과연 ‘쇼’일까?

    - 독재자 카다피는 왜 그를 리비아로 초청했으며 현재 그는 중국에서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가?







    추천사



    ● 양일석 (서울대 명예교수, 당시 수의과대학 학장)

    이 책을 읽고 10년 전 일이 새롭게 떠올랐다. 조작의 실체를 알지 못한 언론은 ‘시키는 대로 했다.’라는 어느 연구원의 말을 대서특필하여 당사자는 ‘사기꾼’이 되었지만, 검찰수사와 공판과정을 거치면서 그 연구원은 업무방해죄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자신의 본업에 종사하면서 팩트를 찾기 위해 10년 동안 지속적으로 추적하여 기록으로 남긴 저자의 집념에 찬사를 보낸다.



    ● 이상희 (헌정회정책위의장, 전 과기처 장관)

    인류 역사는 낮과 밤을, 성공과 실패를 수많이 반복하면서 발전해 왔다. 특히, 과학기술 분야는 Research&Development의 R&D라는 낮이 있는 반면, Risk&Danger의 R&D라는 밤도 있기 마련이다. 낮과 밤이 반복하는 가운데 인간의 생명력도 있는 것처럼, 성공과 실패가 반복하는 가운데 과학자의 창의력이 빛나기 마련이다.

    황우석 박사의 연구과정이 바로 이 같은 모델이라는 점에서 인간적 공감대가 형성된다. 이 책을 통해서 더욱 절실한 창의적, 인간적 공감대가 형성되기를 기원한다.



    ● 김미화 (방송인)

    노광준 PD. 나는 노 피디가 황우석 박사에 대해 이런 집념을 가졌는지 몰랐다. 그의 고뇌가 느껴진다. 덕분에 황우석이라는 한 인간을 다시 바라볼 수 있었다. 고맙다. 그의 문제적 관심이.



    ● 정은진 (변호사)

    저자의 통찰력은 우리가 진실 일부만을 알 때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저자를 따라 10년 취재기를 동행하다 보면, 감동과 함께 어느새 큰 그림을 그리게 될 것이다.



    ● 김용민 (〈나는 꼼수다〉, 〈김용민브리핑〉 진행연출 방송인)

    노광준은 ‘비판할 게 10이라면 10 정도만 비판하자. 100은 곤란하다.’라는 소신을 품고 있다. 황우석이 표적이 되던 때에 그랬고 내가 19대 총선 당시 여당과 친정부 언론에 과도한 공격을 당하던 시기에도 일관됐다.

    나는 황우석과 그를 둘러싼 논란은 썩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이번 책이 갖는 의미가 황우석에 대한 객관적 평가에 그치지 않고 한국사회 공론의 장을 건강하게 가꾸고자 함에 있다고 믿는다. 우리 사회 불공정성을 딛는 것에 직업적 소명의식을 건 노광준의 진심을 알기에.



    ● 성제훈 (과학자, 『성제훈의 우리말 편지 1, 2』 저자)

    과학은 논리로 무장하고, 학자는 논문으로 말한다. 그럼 피디는 무엇으로 무장하고 어떻게 말해야 할까?

    노광준 피디를 보면, 끈기로 무장하고, 책으로 말하는 것 같다. 그동안 과학을 했다고 말하는 모든 사람은 이 책을 봐야 할 거다. 그리고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나는 앞으로 논리적이라거나 합리적이라는 낱말을 쓰지 않겠다.



    ● 최성숙 (총신대학교 평생교육원 미술심리치료 책임교수)

    영화를 만들어도 좋을 만큼 마음과 이성을 담아 아주 잘 쓴 책이다. 움베르토 에코처럼. 산도르 마라이처럼.

    기회를 주고 입증해보라고 했으면 될 일을 너무 멀리까지 왔다. 이제라도 늦진 않았다. 누구나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는 있어야 한다.



    ● dawn (크라우드 펀딩 시민)

    기록은 불씨가 될 것이다!



    ● human (크라우드 펀딩 시민)

    진실과 정의가 꼭 승리하는 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 Andrew Park (크라우드 펀딩 시민)

    진실을 가릴 수는 있어도 없앨 수는 없다는 말을 믿는다. 우리 생에 꼭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기대한다.





    본문 중에서



    그런 내가 우연히 이 사건 속으로 빨려 들어간 순간부터 내 삶도,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많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몇 달 전의 일이다. 방송국에서 기자 후배 한 명이 귀띔해 준다. 어떤 인터넷 사이트를 들어가 봤는데 거기서 내가 아주 ‘유명인사’가 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뭐라고 써놨더냐고 물어보니 그 후배는 그냥 씨익 웃고 만다. 직접 들어가 봤다. 그랬더니 정말, 나보다도 나를 더 자세히 분석해 놓고 있었다. (머리말, 6쪽)



    그를 짓밟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또한 이상했다. 아니 무슨 조폭이나 동네 양아치들도 아니고, 오히려 싸움이 나면 말리고 수습해야 할 언론과 지식인들과 공권력이 앞장서서 그를 두들겨 패고 있었다. 사람 하나 반쯤 죽여놓고 있었다. (머리말, 9쪽)



    그 후 많은 시간이 지났다. 십 년이면 강산도 바뀐다는데 이 사건은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바뀐 것이 없다. 결국, 지난 2014년 대법원에서 ‘사기 무죄’ 확정판결을 받기는 했지만, 황 박사는 여전히 희대의 사기꾼 취급받으며 단 1초도 한국에서 줄기세포 연구기회를 허락받지 못한 채 황해를 오가며 외국에서 재기를 모색하고 있다. 나는 그 새 수십 가지 의혹을 독학으로 더 풀어왔지만, 여전히 여러 개의 냄비받침을 제작한 악명높은 언론계 황빠 5호로 살고 있다. (머리말, 13쪽)



    10년째 펼쳐지고 있는 이 각본 없는 드라마가 어떻게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도 궁금하다. 바람이 있다면 ‘그 후 그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어요.’가 아니라, ‘그 후 그들은 연구기회를 부여받아 누구보다 열심히 연구하고 있어요.’로 끝났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과학자에게 기회조차 줄 수 없는 나라에 더 이상의 미래를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난 10년간의 외롭고 황량한 취재여행길에서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름 없는 천사들을 많이 만났다. 목소리는 크지 않지만 정의롭고 따뜻한 그들은 내게 인생은 살아볼 만한 것이며 아직도 우리에게 미래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줬다. 이제 21세기 산업혁명에 비견될 바이오 혁명의 불씨를 놓고 펼쳐지는 세계 생명윤리 정치와 경쟁자들의 격돌, 이에 맞서 절대 포기하지 않고 연구를 거듭해온 잡초들의 뭉클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머리말, 18쪽)



    야구를 좋아하던 8살 소년이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이 마비된다. 그러나 소년은 웃음을 잃지 않았고 휠체어를 밀어 과학자에게 다가간다. “교수님이 황우석 교수님이시죠! 저~ 정말 잘 생겼죠? 저 좀 제발 일으켜 주세요.” (제1부, 26쪽)



    여기서 사라진 줄기세포 4개를 제외하더라도 7개. 10년이 지난 2015년 현재까지도 이 정도 성과를 낸 연구팀은 전 세계를 통틀어 단 한 팀도 없었다. 오염사고로 죽은 줄기세포 4개를 제외한 채 논문을 내도 논문이 됐다는 말이다. 테라토마 검사까지 마친 두 개의 줄기세포로만 논문을 썼더라도 놀라운 실적이었다. 그러나 황 박사는 지금은 갖고 있지 않은 4개의 줄기세포를 논문에 포함시켰다. 지나친 과욕이었다. 왜 그랬을까? (제7부, 73쪽)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인 기술력을 입증받은 뒤 그의 조국 대한민국이 줄기세포를 이용한 재생치료 연구에서 세계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될 ‘바이오 코리아’의 꿈. 그는 이미 마스터 플랜을 한국 정부 수뇌부와 함께 구상해 놓고 있었다. 전 세계 줄기세포 전문가들을 불러모아 난치병 환자들에 대한 임상시험을 비롯해 다양한 실용화 연구를 과학강대국인 미국도 영국도 일본이나 중국도 아닌 한국에서 추진한다는 꿈같은 계획. 그러나 황 박사와 정부 요인들에게 그것은 1단계 구상에 불과했다. (제7부, 73쪽)



    말도 안 되는 소리들. 그랬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말도 안 되는 음해들’이었지만 당시 그의 제보를 경청하는 황우석 반대자들과 〈PD수첩〉에게는 황우석 박사를 ‘사기 과학자’로 확신하게 한다. 그리고 몇 달 뒤, 제보자는 그들의 열망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가짜줄기세포를 입증할 ‘큰 거 한방’을 제시했다. 물증이 터진 것이다. 2005년 10월 19일이었다. (제12부, 124쪽)



    실험은 한국에서, 운영은 미국에서. 법정에서 안 교수가 밝힌 섀튼의 구상이었다. 그는 황 박사와의 공동연구를 통해 거액의 국비지원을 받았고 황우석팀 연구원들을 받아들여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는 등 속된 말로 ‘남는 장사’를 했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세계줄기세포허브’라는 미래 지분이 있었다. 이랬던 그가 모든 걸 놔둔 채 느닷없이 배에서 뛰어내려 탈출한다. 도대체 어떤 암시를 받은 것일까? (제16부, 154쪽)



    모든 줄기세포가 ‘미즈메디 것’으로 뒤바뀐 현실에서 ‘미즈메디’라는 단어를 쏙 빼고 ‘줄기세포는 하나도 없다.’라는 프레임으로 바꿨다. 조작의 책임을 황우석에게 전가하는 노련한 전략가의 ‘프레임’ 전쟁이었다. 훗날 노 이사장은 법정에서, 조작의 책임이 미즈메디로 오는 것을 피하려고 그날의 폭로를 했다고 시인했다. (제22부, 192쪽)



    아이와의 즐거운 추억을 회상하며 김 목사는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곧 〈PD수첩〉의 언론폭로를 떠올리며 그의 얼굴은 굳어졌고 눈시울은 빨개졌다. 2005년 12월 15일의 폭로, 그날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황 박사와 노 이사장 간의 진실게임이 벌어졌고 서울대 조사 이후 모든 언론은 황 박사를 희대의 사기꾼으로 몰아갔다. 황 박사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재연실험 기회를 달라며 절규했지만, 재연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2006년 9월 10일. 어린 왕자는 쓰러졌다. 의식을 잃은 채 산소호흡기에 의지하며 목숨을 연명하는…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갔다. (제23부, 202쪽)



    모든 줄기세포가 미즈메디 것으로 밝혀지던 시점에 황우석과 선을 긋고 김선종을 위로하던 노 이사장은, 김선종의 줄기세포 조작이 덜미를 잡히던 시점에 또다시 김선종과의 선 긋기에 들어섰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 나는 검색을 계속했고, 더 이상 검색해봐야 신통치 않을 만큼 언론이 한 가지 색깔로 정리된 시점에 이르자, 줄기세포 법정을 찾아 숨겨진 진실을 구했다. 그래도 모르는 부분이 있을 때 한국 언론 대신 외신기사와 과학논문을, 그리고 연구현장을 찾아 과학자들을 인터뷰하게 되었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그때 그 검색창은 10년간의 ‘헛짓거리’ 취재로 들어서는 지옥문이었던 것 같다. (제24부, 210쪽)



    만일 서울대가 단 한 번이라도 황 박사에게 재연기회를 부여했더라면, 9년에 걸친 법정공방도 소모적인 논쟁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대는 재연기회를 주지 않았다. 반론권도 없었고 조사위원 8명 가운데 체세포복제 분야 전문가 한 명 없었다. 그러면서 조사 첫날부터 황우석 연구실을 폐쇄했다. (제25부, 223쪽)



    그러나 서울대는 재연기회를 주지 않았다. 자신들의 약속도 과학자의 간절한 호소도 저버렸다. 왜 그랬을까? 그들이 재연실험을 하지 않기로 한 데에는 대학본부. 즉 정운찬 당시 총장의 의중이 개입된 것으로 보인다. 정명희 조사위원장은 법정에서 분명히 말했다. 재연실험 여부는 학교(대학본부)의 몫이라고. 나에게 묻지 말라고. 그리고 정운찬 총장은 당시 강연회장에서 분명히 말했다. 절대 재연실험 재검증은 있을 수 없다고. (제26부, 229쪽)



    그 큰 광화문 네거리에서 촛불을 든 사람들은 외로운 섬이었다. 황빠. 광신도. 사이비 종교집단이라는 딱지가 붙은 이상한 사람들이 되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황우석 박사의 사진이 새겨진 배지를 숨겼고. 다음날부터 황우석 촛불조차 사회병리현상의 일종이라고 지적하는 주류 언론의 융단폭격이 시작됐다. (제27부, 242쪽)



    70% 이상의 국민여론을 정신병으로 몰아가는 주류들의 완고함 앞에 이름없는 다윗들은 차츰 지쳐갔다. 그런데 그 무렵 자기 이름을 걸고 쓰는 실명칼럼이 나타났다. 서슬 퍼런 주류들의 대오 속에서 실명칼럼을 시리즈로 쓰면서 맞짱을 뜨던 칼럼니스트. 그의 이름은 김어준이다. (제28부, 253쪽)



    전 국민을 고뇌하게 한 황우석 논란, 그 중심에 두 명의 진보 논객이 서 있었다. 김어준과 진중권. 두 사람은 비슷하면서도 많이 다르다. 우선 둘 다 서울대에 입학원서를 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러나 김어준은 세 번 내리 떨어진 끝에 다른 대학에 갔고 진중권은 서울대 미학과에 다녔다. 둘 다 젊은 나이에 외국물을 먹었다는 점도 비슷하다. 김어준은 도무지 대학에 정붙이지 못하겠다며 배낭 하나 짊어지고 여러 나라를 유랑했고, 진중권은 최루탄과 화염병으로 얼룩진 학부생활을 마친 뒤 카를 마르크스가 태어난 독일로 유학 갔다. 둘 다 한창 돈 벌어야 할 나이에 정권과 맞붙었다. 진중권은 그 막강하던 조선일보에 침을 뱉었고 김어준은 딴지일보를 세워 보수 여당에 맞서왔다. 이처럼 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사람이 극명한 견해차를 보인 사건이 바로 황우석 사건이었다. (제29부, 254쪽)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한 시민의 말이다. 주부, 직장인, 자영업자, 농민, 대학원생, 법조인, 특허 변리사까지. 다양한 직업군의 시민들이 KBS 앞에서 촛불을 들었다. 이들의 대오는 시민단체나 진보정당이 아니었기에 조직적이지도 숙련되지도 않은 느슨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더구나 인터넷 공간에서 실명이 아닌 ‘닉네임’을 쓰며 정보를 공유해온 사람들이었기에 후일담이긴 하지만, 이들이 전원 연행되었을 당시 신원조회를 하던 경찰은 큰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제30부, 272쪽)



    내 머릿속에는 영화필름 같은 장면들이 그려지고 있었다. 거센 생명윤리 논란 속에서도 줄기세포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려고 각종 강연회와 세미나, 정책 입안자들과의 미팅을 수시로 가지면서도 복제돼지의 분만시간에 맞춰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돼지우리 안에서 복제돼지들을 직접 받아내는 황 박사의 모습. 다음날 새벽에는 다시 줄기세포 실험실에서 세포 상태를 보고받고 하루일과를 시작하던 쉰 살이 넘은 서울대 석좌 교수의 모습. 세상에 그런 사기꾼도 있던가? 아마도 그 장면은 내 머릿속에서만이 아니라 재판부의 머릿속에서도 똑같이 돌아가고 있었을 거로 생각한다. 사기 무죄 판결은 그냥 얻어진 게 아니었다. 황 박사에게 모든 죄를 떠넘기는 공동연구자들의 거짓증언들과 강요된 진술들 아래 가려져 있던 진실의 파편들을 한조각 한조각 가려내고 확인하고 맞춰가면서 마침내 이 복잡한 사건을 재구성해낸 한 비주류 법조인의 피눈물 나는 집념의 성과였다. 이봉구 변호사. 나는 지난 2009년 2월 2일의 법정에서 그의 팬이 되었다. (제34부, 314쪽)



    더 이상 황우석 박사 사건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바로 나의 일이었다. 어쩌면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누군가의 일이 될 수도 있었다. 나는 열 대 맞을 잘못을 갖고 백 대 천 대 두들겨 맞아 기회조차 빼앗긴 황우석 박사의 사건을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그가 어떻게 뒤집어쓰고 어떻게 두들겨 맞았는지 분명히 기록해 국민은 바보가 아니며 틀림없이 누군가는 보고 있었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사람 하나 자빠뜨리고 주저앉히는 일이 결코 간단한 일도 쉬운 일도 아니란 걸 보여주고 싶었다. 나도, 그리고 예전에 방송사 문턱을 넘어 제보해왔던 그 억울한 사람들의 바람도 그랬으니까. (제35부, 322쪽)



    황 박사가 국민적 영웅이던 시절, 그의 주변에는 수천 개, 아니 수만 개의 별들이 모여들었다. 그의 주변엔 늘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그 콧대 높은 서울대 교수들도 매일 아침 눈도장을 찍지 못해 안달복달할 정도였다. 국회의원이나 유명 정치인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헌데 그랬던 그가 만신창이 상태로 내동댕이쳐지자 발길이 뚝 끊겼다. 〈사이언스〉 논문의 공저자들은 ‘내 이름이 왜 거기 있냐.’면서 손사래를 쳤고 황 박사와 함께 찍은 사진을 큼지막하게 걸어뒀던 국회의원들은 서둘러 액자를 떼고 흔적을 지웠다. 한 때 ‘좌병천 우성근’이라고 보도될 만큼 황 박사의 뒤를 그림자처럼 밟았던 젊은 교수들조차 황 박사가 마지막 기자회견을 했던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제8막, 338쪽)



    국제 사기꾼 취급을 받던 황 박사에게 미국의 바이오기업은 10년 전에 죽은 개를 복제해줄 수 있느냐는 제의를 했다. 그들은 농담처럼 크리스마스 선물로 줬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황우석팀은 정말 크리스마스 전에 다섯 마리를 복제했고 왕의 귀환은 시작됐다. (제40부, 355쪽)



    한국정부는 2006년 3월 황 박사의 인간 난자 줄기세포 연구 승인을 취소시켰다. 한국 땅에서는 더 이상 줄기세포를 연구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 사이 현이의 가족들은 인터뷰 공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김제언 목사는 현이를 찾아온 기자들 앞에서 ‘자신은 아직도 황우석 박사를 믿고 있고 그에게 연구기회만은 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했지만, 그의 말은 이리저리 편집돼 다른 뜻으로 변형됐다. 아이에 대한 기사를 봤다며 또 다른 사람들이 몰려왔다. 전국 곳곳에서 현이를 고쳐주겠다면서 다양한 치료법을 들고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제42부, 373쪽)



    국내에서 단 1초도 줄기세포 연구를 할 수 없던 황 박사에게 리비아에서 특사가 찾아온다. 리비아 최고지도자의 뜻을 전하려 한국을 찾아온 영국 유학파 여성 의학자였고, 그녀를 따라 황 박사 일행이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를 향해 출국한 날은 2008년 11월 9일이다. (제43부, 381쪽)



    종교를 바꾸면 연구기회를 줄 수 있다…. 지금은 로마 교황청이 갈릴레이를 심판하던 중세시대가 아니라 21세기다. 그런데 왜 이토록 집요한 종교재판이 계속되는 걸까. 그런 사이 난치병 환자들은 뾰족한 치료 약도 없이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과 피눈물을 흘리며 싸우고 있다. 어느 난치병 환자는 자신의 고통을 이렇게 표현했다. “차라리 말기암 환자가 부럽다.”

    모진 고통과 희망없는 치료에 기력마저 잃고 오랜 투병으로 생긴 욕창에 시달리면서도 그들은 몸을 뒤척이며 검색창을 통해 줄기세포 연구 동향과 과학자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었다. 거창한 희망도 아니다. 연구자에게 연구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현실 속에 혹시라도 연구기회가 주어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었다. 그러나 ‘혹시나’로 시작해 ‘역시나’로 끝나는 눈물의 검색이 반복되고 있다. 나는 인터넷에 올라온 어느 난치병 환자의 사연을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44부, 391쪽)



    이런 난치병 환자들의 간절한 기다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국의 가톨릭 교단은 완강하게 이 분야 연구를 반대하고 있다. 그리고 ‘황우석식 연구만이 능사가 아님을 보여주겠다.’라는 듯 윤리적 논란이 별로 없는 다른 방식의 줄기세포 연구를 무려 100억 원의 자금을 조성해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그들은 황 박사가 한창 연구성과를 발표할 때도 그랬고, 황 박사가 퇴출당한 뒤 다른 연구자가 이 분야에 도전할 때도 그러했다. 마치 ‘지동설’을 억압하고 ‘천동설’을 지원하던 중세 로마 교황청을 보는 듯하다. (제44부, 392쪽)



    한국과 리비아를 오가며 연구하고 있던 황우석 박사에게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검찰의 사기횡령 기소 후 3년 넘게 치열하게 전개된 법정 공방이 어느새 1심 판결을 남겨두고 있었다. 2006년 6월 20일 첫 공판이 시작된 이후 무려 43차례의 공판. 그 사이 재판부가 세 번이나 교체되고 70명이 넘는 증인신문이 이뤄졌다. 증거자료로 채택된 자료의 분량만 2만여 쪽에 달하는 유례없는 마라톤 공방. 이제 끝이 보였다. 재판부 판결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치르는 제44차 결심 공판. 이 자리는 별도의 증인 없이 원고 측과 피고 측이 마지막으로 한마디씩을 하는 자리였다. 검찰은 재판부를 향해 피고인 황우석에게 이러이러한 처벌을 내려달라고 요구하는 ‘구형’을 할 것이고 이에 대해 피고인(황우석)은 마지막으로 재판부를 향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최후진술’을 할 것이다. (제46부, 406쪽)



    ‘왜 재판 중인 조작 과학자에게 도민의 혈세를 지원하느냐.’라는 거센 비난을 무릅쓰고 경기도지사는 황 박사의 복제돼지 연구를 지원해줬고, 이후 경기도에서 당뇨병과 알츠하이머 질환연구에 긴요하게 쓰일 수십 마리의 형질전환 복제돼지들이 태어났다. (제47부, 413쪽)



    황우석 1번 줄기세포 NT-1이 ‘처녀생식’이 아닌 세계 최초의 ‘복제 배아줄기세포’라는 재검증 논문이 국제학술지에 실렸다. 거의 동시에 캐나다 특허청 홈페이지에 복제 배아줄기세포로의 특허 등록이 공시되었다. 2011년 7월 26일이었다. 그 소식에 한국의 과학기술처 장관을 역임한 이상희 변리사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제10막, 424쪽)



    그 자신감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나는 시간이 조금 지나 알게 되었다. 그것은 두 가지였다. 언젠가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줄기세포를 너끈히 만들어 낼 수 있을 만큼 후속연구가 준비되었다는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하나였고. 그가 처음 만들어낸 1번 줄기세포의 지적 재산권(특허)을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과거’에 대한 자신감이 또 하나였다. 그것은 거친 황야에서 세찬 비바람을 맞아온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여명의 온기’였다. (제48부, 431쪽)



    이처럼 이름 없는 민초들이 온몸을 내던져 서울대의 특허포기를 막아냈다. 비록 호주 특허는 물 건너갔지만, 특허권을 넘겨받은 황우석팀은 이후 다른 나라 특허청들의 더욱 거세진 질의와 거절사유에 발 빠르게 대응하며 과학적 사실에 기반을 둔 ‘팩트 논쟁’에 들어갔다. 서울대 측은 특허권을 넘겨주면서 특허가 등록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지만 이후 황우석팀은 보란 듯이 관련 논문과 특허 등록으로 화답했다. 나는 그때 서울대 앞에서 한겨울을 보내던 민초들의 모습에 이름을 붙여본다. 그것은 ‘관악산대첩’이었다고. (제50부, 451쪽)



    그러나 대한민국은 특허를 반기지 않았다. 줄기세포의 등록업무를 관할하는 한국정부의 질병관리본부는 황우석 1번 줄기세포에 대한 등록 신청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과도한 난자를 사용해 만든 비윤리적인(?) 줄기세포주인데다 처녀생식(?)이라는 과학적 입장이 분명한 만큼 등록시켜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등록되지 않은 줄기세포는 마치 불법체류자처럼 모든 것에 있어 제약을 받는다. 분양을 해줄 수도 받을 수도 없다. 외국에서 특허 등록된 1번 줄기세포였지만 한국 내에서는 연구조차 할 수 없는 어이없는 상황이 전개됐다.

    결국, 또다시 소송전이 시작됐다. 황 박사 측은 1번 줄기세포는 생명윤리법 시행령이 발효되기 이전에 수립된 것으로 생명윤리법상 하등의 문제가 없고, 더구나 시행령 이전에 수립된 줄기세포에 대해서는 그 실체가 체세포복제든 처녀생식이든 간에 생성방식과 상관없이 등록대상이 된다는 점을 들어 질병관리본부가 법을 어기고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제51부, 455쪽)



    그러나 국제 과학계에서 황 박사가 왜 코요테를 복제했는지 그 진정한 의미를 꿰뚫어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러시아 과학자들이 찾아왔다. 러시아 북동연방대학교(NEFU)의 연구자들과 대학총장(미하일로바)이었다. 그들은 직접 한국을 찾아 황 박사를 만난 자리에서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매머드를 복제하자고. 북동대학이 위치한 시베리아 동토의 땅에 묻혀있는 매머드의 사체를 발굴해 수만 년 전에 멸종된 매머드를 복원해보자는 ‘매머드복제’ 프로젝트였다. 황 박사는 그들에게 반문했다. 왜 수십 년 전부터 매머드복제에 뛰어든 일본이나 서구의 연구팀이 아닌 자신을 찾아왔느냐고. 그랬더니 그들은 간결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코요테를 복제했고 그들은 못했지 않는가?” (제52부, 466쪽)



    성공확률 1.6%. 지난 2005년 그들이 세계 최초로 복제개 ‘스너피’를 성공시켰을 때 〈네이처〉 논문에 보고된 성적이다. 당시 언론은 효율이 워낙 낮아서 실용화는 어려울 것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7년 뒤인 2012년 그들은 무려 27%의 성공률로 코요테를 복제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2014년 그들은 평균 35%의 개복제 성공률로 개복제를 실용화 단계에 올려놨다. 불과 10년이 채 안 되는 동안 1.6%라는 희미한 가능성이 35%의 엄연한 현실로 변한 것이다. 이것이 불가능에 도전하는 과학의 본모습이 아닐까? 만일 10년 전 그 추운 겨울날 재연기회를 달라던 과학자의 절규를 외면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제12막, 505쪽)



    한 편의 코미디였다. 다른 나라도 아닌 미국에서 등록된 특허에 발명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특허는 의미 없다.”라고 언론 인터뷰를 하고 있는 나라. 그것이 2014년 대한민국의 풍경이었다. 특허검증이 곧 과학계 검증은 아니라는 반론도 있지만 내가 볼 때 이는 지극히 교과서적인 말이다. 특허청, 특히 미국 특허청은 NT-1에 대한 논란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국의 과학자 두 명이 경합하고 있는 특허였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제럴드 섀튼이었고 또 한 사람은 가장 최근에 이 방식 줄기세포를 세 개나 만들어낸 미탈리포프였다. 이 치열한 경합과 과학논쟁 속에 미국 특허청은 왜 황우석이라는. 자기 나라에서 사기꾼 취급받으며 연구권한마저 취소된 논란의 연구팀에게 특허증을 내줬을까. 결정적으로 실험데이터였다. 미국 특허청이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실험데이터가 들어갔던 것이다. 내가 미국 뉴욕에 있는 황우석 박사 측 특허 대리인과 국제전화를 한 날은 2014년 2월 13일 새벽이었다. (제57부, 511쪽)



    나는 그 자막을 보고 직감했다. 그것은 명예훼손 소송에 대비한 장치라는 것을. 순간 영화제작자에게 전해졌던 나의 책이 어떤 용도로 쓰여졌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감독이나 배우가 아닌 법률전문가들이 내 책을 탐독하며 추후 발생할지도 모르는 소송에 대비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 나갔나? 영화는 황우석이라는 과학자를 젠틀한 ‘사기꾼’으로 그려냈다. 겉으론 학자인 척하며 속으로는 조작을 주도하고 언론과 권력까지 조종하면서 급기야 방송국을 찾아가 담당피디에게 이런 협박까지 해대는 절대 권력. (제58부, 520쪽)



    2015년. 새해 벽두부터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중국의 최대 생명공학 기업과 미국의 복제 배아줄기세포 석학이 한국의 제주도로 날아와 황우석 박사와 함께 1천억 원 규모의 공동연구 협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제58부, 529쪽)



    기사에 대한 한국 내 반응은 한 마디로 ‘어리둥절’이었다. 근 10년간 ‘희대의 사기꾼’ 취급을 받아오던 그가 중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미국의 석학과 손을 잡고 있으니 이게 도대체 어떤 시추에이션인지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그러나 황 박사의 1번 줄기세포의 특허가 미국에서 등록된 이후 국제 과학계의 동향변화를 유심히 살펴보던 사람들이라면 ‘올 게 왔구나!’ 하며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는, 그것은 ‘예고된 특종’이었다. 한국 내 반대자들은 1번 줄기세포 특허를 의미 없는 종이쪼가리취급했지만 국제 과학계의 평가는 달랐다. 지난 2014년, 특허가 등록되기 한 달 전부터 과학계의 양대 산맥인〈사이언스〉와 〈네이처〉는 황우석 박사에 관한 특집기사 올리기 경쟁을 벌였다. 1월 14일에는 〈네이처〉가 ‘복제의 귀환’이라는 제목의 특집기사를, 다음날인 1월 15일에는 〈사이언스〉가 ‘연구부정 이후 구원을 찾는 한국의 복제 과학자’라는 특집기사를 게재했다. 두 잡지 모두 아시아 담당 기자를 파견해 황우석 연구소를 현장 취재하고 이에 대한 미국 등 과학자들의 반응을 전하며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전례 없는 일이었다. 조선일보가 특집기사로 보도한 사람을 그다음 날 동아나 중앙이 특집으로 보도하는 일을 본 적 있는가? 과학계 두 개의 톱으로서 치열한 자존심 대결을 벌이던 〈사이언스〉와 〈네이처〉였기에 그 자체만으로도 유례없는 사건이었다. (제58부, 5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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